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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적기

대한민국 흔한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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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한 20대의 남자

 

나는 길거리 돌멩이 보다도 더 찾기 쉬운 대한민국 흔한 남성이다. 20대가 되어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도 내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을 주도적으로 선택한 기억은 없다. 남들이 모두 다니는 초, 중, 고등학교에 다녔고 정해진 교과과정을 따랐다.

 

대학에 가야 취업을 하고 취업을 해야 돈을 번다는 공식은 불문율이었고, '대학 후 취업' 외 다른 길이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태어난 김에 살아가던 나는 원래 항상 하던 대로 수능 본 김에 점수에 맞춰서 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생활은 고등학교보단 덜 따분하고 덜 칙칙했다. 상상했던 낭만은 없었지만 그래도 캠퍼스를 거닐면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대학생이 되었으니 일단 놀아야 된다는 법칙은 대한민국 법보다 더 철저히 지켰다.

 

그렇다고 인싸 무리에 어울리며 화려한 대학생활을 즐긴 것도 아니었다. 그냥 F는 맞지 않을 정도로 출석을 하고, 선배가 불러주는 대로 술자리에 나가고, 몇몇 동아리에 가입해서 대학생활에 나를 끼워 맞추려 노력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었다.

 

 

 

# 흔한 대학생의 위기

 

흔한 대학생에게 닥치는 가장 흔한 위기는 역시 '등록금'이 아닐까? 하필이면 대학생활을 시작하려고 하니 아버지는 주식으로 큰돈을 잃은 데다가 건강까지 문제가 생기셨다. 부모님이 대학 등록금을 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단 한순간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누가 등록금은 부모님이 내주시는 거라고 했을까? 누가 부모님이 대학 등록금을 내주실 형편이 되지 않으면 빚을 내서라도 대학을 졸업해야 한다고 했을까? 내 머릿속에는 누군가 그렇게 말해준 기억은 없었다. 다만 남들 다 다니는 대학을 못 다니게 된다니 왠지 모를 불안감만 엄습해올 뿐이었다.

 

이런 위기에도 흔하지 않은 이들은 온라인으로 이것저것 팔아서 등록금을 마련했다거나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을 받았다거나 하는 등 특별한 방법으로 헤쳐나간다. 하지만 이런 극적인 상황은 내게는 일어나리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생각해보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알바를 해서 등록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학자금 대출은 싫었다. 왠지 몰라도 빚은 나쁜 거라는 등식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 흔한 승선

 

흔함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누군가에겐 스스로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모습이 흔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세상에는 그런 삶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저 남들이 띄어놓은 배에 뒤늦게 승선하여 주어진 잡일이나 하는 것 이외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 배가 튼튼한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으면 그걸로 됐다. 정원은 이미 초과됐지만 돛에 매달려서라도 같이 가야 했다. 일단 다수에 대열에 합류했다는 사실만으로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돛에 매달려 가는 이에겐 배의 작은 흔들림에도 버틸 재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흑 같은 바다에 빠질 수도 있다는 공포에 돛을 더 꽉 붙들고 버티고 또 버틴다. 배가 어디로 가는지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고통에 울부짖으며 하루하루를 버틸 뿐이다.

 

 

# 고통의 의미

 

고통이 왔을 때 스스로 진행 방향을 명확히 알고 있다면 고통을 지속할지 멈춰야 할지를 판단할 수 있다. 타고 있는 배가 튼튼하고 풍요로운 대지를 향해 항해 중이라면 뱃멀미 정도의 고통은 참고 끝까지 항해를 지속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거의 부서져가고 목적지도 잃은 배에서 멀미로 고통받느니 바다에 뛰어드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출발점까지 헤엄쳐간 뒤 다시 훌륭한 배에 승선하면 된다. 척박한 땅에 빨리 도착하기보다 풍요로운 땅에 늦게 도착하는 편이 훨씬 낫다.

 

내가 고통이 왔을 때 나는 내가 무슨 배를 타고 있었는지 전혀 파악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 고통마저 붙들고 버텼다. 그 고통을 버티면 언젠간 아물거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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